0814_덕수궁(서울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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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한가운데,

광복적 전날 덕수궁을 방문했다.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다.

광해군이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긴후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그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이후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이 철거되었고,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상장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이곳은 임진왜란과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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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장교대식이 있던 시간에 도착.

아쉽지만 '대한문 일원'을 찍는 것은 생략하고,

후다닥 덕수궁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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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은

덕홍전과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

(이 곳은 이따가 찬찬히 살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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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中和殿)

이곳은 경운궁의 정전(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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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踏道)에는

조선 궁궐의 정전 중 유일하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는 모두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대한제국 출범 후 지어진 건물이기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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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에서 바라본 중화문(中和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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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石造殿)

고종황제가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부터 1910년에 걸쳐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

경운궁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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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옆에 자리한 "덕수궁 미술관"

그 앞에 자리한 정원과 분수는 서구형 정원으로 1938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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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浚明堂)과 즉조당(卽阼堂)

즉조당 일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쳐했던 곳으로 덕수궁의 모태가 된 곳이다.
또,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준명당은 황제가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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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어당(昔御堂)

즉조당 일원으로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10여 년간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때 경운궁은 西宮으로 불림)

서궁유페는 결국 반정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고,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경운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가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서 즉위한다.

유폐의 한이 맺혀 있던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36조의 죄를 물은 후 능양군에게 옥새를 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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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靜觀軒)

이곳은 그 이름처럼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서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 보는' 휴식용 건물이다.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A.I.Sabatin)이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서,남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베란다가 둘러쳐 있다.

고종황제는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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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의 흥미로운 점은

석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식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기둥 상부에 청룡과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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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송전(德弘殿)

이곳은 고종황제가 고관 관료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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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咸寧殿)

고종의 환어와 함께 1897년에 건립된 왕의 침전이다.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되었다.


함녕전에서 시작된 경운궁 대화재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경운궁은 거의 잿더미로 변하였다.

당시 일본측 언론에선

"함녕전 온돌을 수리한 뒤 말리는 과정에서 불을 잘못 때어

나무 기둥에 불이 옮겨 붙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온돌의 구조적 특성상 과열되었다고 해서 기둥에 불이 옮겨 붙기는 어렵다는 점,

바람이 거세었다고는 해도 그 피해 범위가 너무나 넓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일제에 의한 방화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각국의 공사관 사이에 위치한 경운궁에

고종이 기거하는 것을 일제가 못마땅해 했다는 점도

방화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고종은 불이 난 후 다른 궁궐의 이어 권유를 물리치고

다음날부터 재건 공사에 착수하도록 지시했다.



2년의 회사생활을 '시청역'부근에서 했기 때문에 익숙한 덕수궁.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역사와 사건들에 대해서는 알 지 못했다.

카메라를 들고 간 그 시간 때마침 만난 "무료안내" 그리고 구입한 "덕수궁책자'

포스팅의 자료 역시 두가지의 '도움'으로...^^);;

부족한 부분은

덕수궁홈페이지 ( http://www.deoksugung.go.kr/ )로 들어가면

무료안내시간과 좀더 자세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사진을 찍고, 자연을 만나는 것을 넘어

과거를 만나고 잠시나마 그 안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이것이 내가 느끼는 "고궁"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내용참고 : 덕수궁 유료안내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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